<守岩칼럼>포퓰리즘에 멍드는 국민연금

 연금개혁 ‘폭탄’ 돌리기만 해…국민 노후보장 ‘곳간’ 잘 지켜야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공매도 금지에 이어 또 시장에 일시적인 마약을 주입한 셈이다. 뒷감당은 차기나 차차기 정권이 해야 한다.”(이찬우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동학개미의 수익률을 위해 국민 전체에 리스크를 넘겼다. 10~20년 뒤에는 매도해야 하는데 그때 충격은 어떻게 감당하나.”(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정부가 4월9일 이례적으로 ‘원포인트’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를 열어 국내 주식의 투자 허용한도를 늘리기로 하자 연기금 분야 전문가들과 학계 등에서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향후 소진에 따른 충격을 줄이려면 지금부터 국내 주식 비중을 줄여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역행하는 꼴이 됐다. 정부의 ‘정치적 판단’으로 미래 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지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최근 국내 증시에서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에게 ‘공공의 적(敵)’이 됐다. 2020년 말 기준 국민의 노후자금 833조(兆)원 이상을 굴리는 국민연금은 세계 3대 연기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만큼 증시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다. 과거 증시가 침체할 때마다 정부의 압력에 떠밀려 주식을 매입해 논란이 됐는데,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다.

●갑작스런 기금운용 지침 변경…‘선거용’ 의심 
국민연금은 2020년 12월부터 국내 주식을 ‘무섭게’ 팔아치웠다. 올해 들어서만 국내 주식을 15조원 이상 순매도했다. 증시 활황세 속에 2021년 국내 주식 비중의 목표치(16.8%)를 맞추기 위해서인데 동학개미들이 이에 크게 반발했다. 증시 활황에 국민연금이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3월부터 청와대 국민청원에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매도 중단’ ‘기금운용본부 해체’ 등 성토의 글들이 올라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연금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위가 3월26일 국내 주식투자 비중을 늘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갑작스런 일이다. 문제는 기금운용 지침을 변경하는 게 통상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매년 5월 다음 연도 자산 투자비율을 확정했는데 올해는 3월에 지침 변경안을 상정했다. 2011년 이래 10년간 유지해온 주식 목표 비중을 서둘러 조정한 것도 그렇다. 2023년까지 국내 주식 비중을 15%까지 줄이고, 해외주식 비중을 30%까지 늘리기로 했던 ‘5개년 중기 자산 배분 계획’에도 배치된다. 4·7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동학개미들의 표(票)를 의식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청와대와 여당이 강하게 압박했다”는 뒷말도 잇따랐다.


●국내 주식 비중 낮춘다더니 오히려 늘려…‘해외 투자 50% 달성’ 어려워져
         

결국 국민연금은 동학개미들의 요구에 굴복해 9일 기금위를 열고 국내 주식 보유 목표 범위를 넓히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국민연금기금 리밸런싱 체계 검토’ 안건을 통과시켰다. 기금위에서 통과된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전략적 자산운용(SAA)상 국내 주식에 투자할 수 있는 한도를 목표치(16.8%) 대비 ±2.0%에서 ±3.0%로 넓힌 것이다. SAA 범위를 넘기지 않기 위해 추가 매도를 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원종현 국민연금 상근 전문위원은 “이번 결정은 단순히 투자 완충지대(버퍼)를 넓혀 여유를 둔 것으로, 국내 주식의 성과가 더 좋은 상황과 매도 행위로 인한 시장 충격을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이같은 조정은 국내 주식의 투자 비중을 줄이기로 한 포트폴리오 조정 방향에 역행한다. 기본적으로 국민연금은 2010년대 들어 위험자산 투자를 늘리되 해외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다. 세계 3위의 ‘큰손’이 세계 주식시장의 0.3%밖에 안 되는 국내 증시에 20% 가까이 투자하는 비정상적 구조를 탈피해야 한다는 지적에서다.

또 다른 이유는 국민연금의 ‘생애주기’ 때문이다. 2010년 국민연금 적립 규모는 약 300조원이었고 현재 약 800조원이다. 하지만 적립금 규모가 1400조원에 이르는 2030년이 되면 연금 수입 대비 지출이 더 많아진다. 물론 투자수익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전체 적립금은 늘어 나지만 증가세가 크게 주춤해진다. 그러다 2042년부터 15년간 가파르게 감소한다. 2018년 재정추계 결과에 따르면 2057년에는 기금이 고갈되고 -124조원을 기록하게 된다.

 이런 생애주기 탓에 국민연금은 불과 9년 뒤인 2030년부터 ‘질서 있는 퇴각’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말 해외 투자 비중을 30%(2019년)에서 50%(2024년)까지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2020년 복지부는 기금위 실무평가위원회에 포트폴리오 조정 이유로 ‘미래 유동성 회수 시 시장 충격 최소화’를 적시했다. 지금은 기금 성장기(연금 수입>지출)이므로 적극적으로 운용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바꿔말해 2030년 전에 서둘러 투자처를 다변화해야 향후 전환기와 감소기에 올 충격을 줄이고, 충격 시기도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국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은 ‘연못 속 고래’ 연금이 방향을 틀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국민연금으로 인한 대규모 오버행(매도 예상 물량)’을 머리에 이고 사는 형국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렇지 않아도 미래 세대는 국민연금 납입으로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이 이전 세대에 비해 크게 낮다. 현재 예상되는 연금 고갈 시기(2057년 이후)에 연금을 수령하게 되는 이들은 연금을 내야 할지부터 고민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이들에게 주식시장에 커다란 매물 폭탄까지 넘겨주는 꼴이 될 수 있다.


●매도세는 잠재울 수 있으나 ‘떼법’에 원칙 훼손 전례로 남아

대부분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이번 투자한도 변경 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개인투자자들의 압력에 정부가 굴복해 기존에 정해놓은 포트폴리오를 원칙 없이 훼손했다는 게 이유다. 이준서 교수는 “국민연금이 추구하는 것은 ‘수익률 제고’인데, 동학개미가 거론되는 식으로 다른 것을 고려하는 행위 자체가 수익률 제고에는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이찬우 전 본부장은 “개인투자자들은 국민연금이 증시를 떠받쳐주는 게 좋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국민연금이 한없이 있을 수 없고 결국은 나가야 한다”며 “정부가 국가 전체의 장기적인 방향을 따르는 게 아니라 개인투자자들의 눈치를 보고 정책을 짜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준행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도 “전문적인 투자 역량이 최대치로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증권업계도 국내주식 비중 확대가 매수세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오현석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지수가 3100까지 달려온 상황에서는 주가가 조금만 올라도 국내 주식을 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매도세는 잠재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금운용에 포퓰리즘은 절대 금물…OECD국가 중 공매도 금지는 한국이 유일 
주가가 떨어질 때 사고, 오르면 파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기금운용 방식이다. 동학개미들이 반발한다고 중기 투자전략을 수정하는 것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다름 아니다. 국민연금은 투자자들을 달래는 자금이 아니다. 기금운용에서 대중영합주의는 절대 금물이다. 주가를 단기적으로 부양할 수는 있겠지만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없다’는 철칙에 비춰볼 때 더 큰 화를 자초할 우려가 크다.정부는 그동안 개인투자자들의 반발에 원칙을 저버리곤 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3월부터 재개하려던 공매도(주가 하락에 베팅)를 동학개미들과 정치권의 압력에 밀려 5월까지 금지하기로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공매도를 금지한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개인투자자 보호’라는 명목으로 포퓰리즘에 두 손을 들었다.여권은 이익공유제 도입 등을 위해 국민연금을 활용하겠다고 해서 논란을 자초했다. 스튜어드십코드(stewardship code) 등으로 기업을 압박해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판도 받았다.

국민연금은 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장을 맡아 사실상 정부가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후진적 구조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자리가 총선 낙선자를 위한 보은용(報恩用)으로 전락한 것만 봐도 그렇다. 가뜩이나 전문성·독립성이 취약한데 정치가 개입하면 곳간이 온전할 리 없다.현재로선 국민연금의 미래는 어둡다. 최근 정부 전망에 따르면 2030년부터 보험료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진다. 2041년부터 적자로 돌어서 2056년에는 적립금이 고갈될 위기다. 세계 최악의 저출산·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이 시기도 앞당겨질 공산이 크다.

가입자는 줄어드는데 연금수령자는 급증하고, 운용수익 제고에도 한계가 있다.그럼에도 문재인정부는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민연금 개혁을 방치하고 있다. 법에 정해진 ‘5년마다 재정추계’ 시기에 맞춰 2018년 연금개혁이 논의됐지만 ‘더 내고 덜 받기’라는 근본 해법은 슬쩍 피해갔다. 정부는 엉뚱하게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이 문제를 떠넘겼다. 결국 복수의 안이 국회에 올라왔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차기 정부로 ‘폭탄 돌리기’를 한 셈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미래다. 국민연금은 어떤 정치적 고려도 없이 시장원리와 투명한 원칙에 따라 운영돼야 한다. 최고 전문가들이 수익률을 높여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사명감으로 무장해야 한다. 정부·여당은 연금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국민연금 가입자 2234만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볼 것이다.

                        세계경제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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