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종식·동구권 민주화의 주역…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별세

소련 개혁·개방으로 역사 한 획군축 등 기여해 노벨평화상부시와 담판 미·소 해빙

냉전 체제에 마침표를 찍은 주역이자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8월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고 러시아의 타스, 스푸트니크 통신 등이 보도했다. 향년 91세.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이날 저녁 사망했다”고 밝혔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2005년 5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는 모습.

1931년 러시아 남서부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모스크바 국립대 법대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부터 공산당에서 활동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린 그는 1985년 54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

‘동·서 냉전구도’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라는 현대사의 대격변을 이끌어 낸 주역 고르바초프는 1985년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뒤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재편)의 양대 정책으로 소련의 개혁과 민주화를 이끌었고,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작으로 40여년 간 이어졌던 동·서 냉전구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또한 1990년 6월에는 미수교 상태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국 뉴욕에서 사상 첫 한·소(韓蘇)정상회담을 가지며 한국 북방외교의 최대 성과로 꼽히는 한·소 수교의 물꼬를 텄다.

미국을 중심한 서방과 소련이 주축이 된 동구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40여 년간 체제 경쟁을 벌여 왔으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개혁정책을 펼치면서 사회주의 세력에 균열이 나기 시작했다.
집권한 해인 1985년 곧바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난 그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하는 등 군비 감축에 나섰다. 이어 1989년 민주화 시위가 동유럽 공산주의권 국가를 휩쓸 때 이들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자유를 허용했고, 그해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이듬해 동서독 통일을 사실상 용인했다.

1985년 11월1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환하게 웃는 고르바초프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특히 1989년 12월 몰타에서는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역사적 담판을 거쳐 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냉전의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회담을 앞두고 소련은 냉전을 지중해에 수장(水葬)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으나, 미국 측은 양국 정상의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라며 거리를 두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회담 직후 미국과 소련 정상은 “세계가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선언했고, 1990년 미국 워싱턴DC에서 다시 만나 장거리 핵미사일과 화학무기 등을 감축하는 데 합의했다.

1990년 2월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추진한 북방정책에 호응해 1990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련 정상으로서는 최초로 한국 정상과 만났고, 그해 9월 한국과 수교를 단행했다. 노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상대국을 방문해 경제 개발과 북한 문제 등을 논의했다. 노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상대국을 방문해 경제 개발과 북한 문제 등을 논의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서방에서 냉전 해체의 주역이자 평화 구축, 동구권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냉전구도 해체로 소련의 영향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1년에는 군부 쿠데타와 소련 해체를 겪었고, 권좌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고르바초프재단을 설립해 활동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여사는 1999년 사망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라이사 여사의 사망에 “라이사를 잃은 것이 러시아를 잃은 것보다 더 슬프다”며 애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의 슬하에는 외동딸 이리나(65)가 있다. 이리나는 현재 고르바초프재단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앞서 7명의 서기장과 달리 10월혁명 후에 태어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에서 체르넨코까지 모두 1917년 혁명 이전에 태어났다. 1931년 생인 고르바초프는 전임자들과 달랐다. 그는 공산혁명의 대의보다는 70년 가까이 실천해온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더 많이 인식하고 있었다.

소련은 정체되어 있었다. 흐루시초프의 개혁이 있었지만 브레즈네프 이후 소련은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국민의 자유는 짓밟혔고, 집단농장의 생산성은 하락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 는 동서냉전의 대결은 국방비를 크게 상승시켜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동유럽의 민주화는 소련군의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 폴란드에선 솔리다리티(연대) 운동이 벌어졌다. 공산권 블록을 유지하는 비용은 모두 소련이 져야 했다.

인민의 소비수요는 늘어갔다. 서방과의 군비 대결로 군수산업에 치중했기 때문에 소비재는 극히 부족했다. 소비와 생산의 격차가 커지면서 수입이 늘어났고, 육류소비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급증, 곡물 수출국이던 소련은 곡물수입국으로 변했다.

관료체제는 기승을 부렸다.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 불리는 공산당 특권계급이 형성되어 관료주의화했고, 그들은 부패했다. 이에 비해 자유를 외치는 사람은 탄압을 받았다. 공산당은 반정부인사에 대한 전화도청, 추적에 비밀경찰 KGB를 동원했다. 비밀경찰의 숫자는 한때 1만6000명이나 되었다.
성직 계급에서 반정부 기류가 형성되었고, 노벨상 물리학상 수상자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반정부 출판물에 소비에트를 비판하는 주장을 폈다. 이들의 힘은 미약했다. 이 모든 것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이 필요로 했다. 그 일을 고르바쵸프가 떠맡게 되었다.

2004년 12월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에서 기자회견을 시작하면서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대화하는 모습.

외국에서는 역사의 물길을 바꾼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러시아에선 소련의 해체를 초래한 장본인이자 동구권을 서방에 넘겨준 ‘배신자’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여 민족 갈등과 소련의 붕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경제 침체에 체르노빌 사태까지 겹친 상황에서 섣불리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나 물가 급등과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을 막지 못한 것도 몰락의 요인으로 지적됐다.

소련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던 그는 결국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 이후 정상의 자리를 지키는 데 실패했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소련 해체를 주도하자 그해 12월 사임을 발표했다. 고르바초프는 올해 초에는 모스크바 외곽에서 여생을 보내왔다고 전해졌다. 자유유럽방송은 고르바초프가 2015년 이후에는 외국 여행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