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뉴 삼성’ 이재용을 움직이나

리움 재개관에 숨겨진 뉴 삼성코드이재용 등 오너 일가 변화 은유적으로 드러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오너 일가가 조용히, 그리고 분명히 변화를 선언했다. 10월8일 서울 한남동의 미술관 ‘리움’ 재개관을 통해서다. 코로나19 확산 등으로 휴관에 들어간 지 1년7개월여 만이다. 리움은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관장이 2017년 이 부회장 구속 여파로 물러난 이후 상설전(展)만 열어 휴관 전까지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따라서 리움 재개관은 이 부회장의 경영 공백기가 끝났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삼성에 리움은 미술관 그 이상이다. 리움을 보면 삼성이 보인다. 이름부터 오너가의 성씨 ‘Lee’와 미술관을 뜻하는 영어의 어미 ‘-um’을 합성한 것이다. L(Lay down·내려놓음), E(Elevation·상승), E(Efficiency·효율), U(Unity·통합), M(Motherhood·모성) 등 리움(Leeum) 영어 철자로 삼성의 현 상황을 분석하면 의미가 있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미술관 ‘리움’의 겉모습
  • Lay down·내려놓음

리움은 재개관에 앞서 전시, 공간 등 전반을 손봤다. 변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내려놓음’이다. 리움 측은 그동안 폐쇄적이고 엘리트주의가 강했다는 지적에 대해 인정하며 ‘문턱 낮추기’ ‘소통’ 등을 다짐했다.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이건희 회장의 미술품을 국민과 함께 즐기기 위해 국가에 기증한 뜻을 계승하고자 상설전을 무료로 운영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삼성 오너 일가는 이 회장이 남긴 고미술품과 근현대 미술작품 등 총 1만1000여 건, 2만3000여 점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2021년 4월 발표한 바 있다.

‘이건희 컬렉션’ 기부와 리움의 달라진 분위기에 미술계는 물론 경제계도 들썩였다. 미술관을 위시한 삼성의 변화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 공언한 ‘뉴(New) 삼성’과 궤를 같이한다. 이 부회장은 2018년 2월 석방되고, 같은 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동일인 지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삼성 총수에 올랐다. 이어 2020년 5월 대국민 사과를 통해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 거듭나겠다는 뉴 삼성 비전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자녀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도 했다.

화가·서예평론가이자 증권맨으로서 미술계와 경제계를 두루 주시해온 김정환 GB투자자문 대표는 “삼성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떨쳐내고 정상화하는 데 미술품 기부, 리움의 변화 등이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 부회장의 사과, 코로나19 백신 문제 해결 노력 등이 더해져 여론 개선을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김 대표는 “곧 이건희 컬렉션을 한데 모은 전시관이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들어서면 삼성으로선 이 기념비적인 공간을 통해 ‘과거와의 결별’과 ‘대국민 소통’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듯하다”고 관측했다.

  • Elevation·상승 

리움 전시와 국립중앙방물관·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온라인 사전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매번 예약 창이 활성화되자마자 매진되는 등 관람 열기가 뜨겁다. 미술계 활황과 삼성가의 브랜드 파워가 맞물린 결과라는 풀이가 나온다. 국내 미술계는 올해 초부터 들썩이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난 사람들이 미술품 공부는 물론 투자에도 거침없이 손을 뻗치면서다.

공교롭게도 삼성전자의 실적 역시 비슷한 이유로 비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1년 3분기에 74조원에 육박하는 매출을 올리며 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고 10월28일 밝혔다. 비대면 업무가 확산하면서 반도체 사업이 호황을 맞은 영향이다. 나흘 뒤 이재용 부회장 없이 열린 창립 52주년 기념식에서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어려움 속에서 괄목할 만한 실적을 달성했다”면서도 “앞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초일류 100년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 자문해 봐야 할 때”라고 여운을 남겼다.

자축(自祝) 대신 미래 대비에 방점을 찍은 배경에는 경영 복귀를 앞둔 이 부회장이 있다. 이 부회장은 재수감을 거쳐 8월13일 가석방된 뒤 정중동(靜中動) 행보를 보여왔다. 9월14일 정부 공식 행사에서 3년간 청년 일자리 3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밝힌 것 외에는 이렇다 할 공개 일정이 없었다. 재계에서는 리움 재개관을 전후로 예열 과정이 마무리된 만큼 이 부회장의 경영에 드라이브가 걸릴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재개관한 리움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 Efficiency·효율

‘시즌2’를 맞은 리움은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미술관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내걸고 효율을 강조한다. 이번 재개관 작업을 주도한 정구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예전보다 훨씬 편하게 올 수 있는 미술관이 되도록 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다”며 “홈페이지, 뮤지엄숍 등까지 이용자 편리성을 높이고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된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전했다.

효율성 추구는 이재용 부회장이 이끄는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이 부회장은 평소 해외출장 때도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회장 별세 후 1년간 재판과 수감생활로 인해 제대로 된 경영활동을 하지 못했던 이 부회장이다. 이제야 ‘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갈 이 부회장은 격식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고효율 경영을 펼쳐 나갈 전망이다.

특히 이 부회장은 부회장 타이틀을 그대로 유지할 여지가 많다. 삼성에서 회장 직급은 1년째 공석으로 남아있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국내 4대 그룹(삼성, 현대자동차, SK, LG) 총수 중 이 부회장만 회장 타이틀이 없다. 2018년 동일인 지정 때부터 회장 승진 얘기가 나왔으나, 사법 리스크에 번번이 가로막혔다”면서 “지금은 승진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이나, 현안 대응과 불필요한 논란 차단이 급선무이니만큼 부회장 직함을 한동안 더 유지하지 않겠나 싶다”고 말했다.

  • Unity·통합

현재 리움은 이재용 부회장의 여동생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겸 리움 운영위원장이 이끌고 있다. 이 위원장 체제로 전환하며 인력도 새로운 진용을 갖췄다. 삼성가의 미술품 관련 사업이 이 위원장에게로 완전히 옮겨가는 모양새다. ‘홍라희 시대’에서 ‘이서현 시대’로 바뀌는 셈이다.

최근 기증한 국보 14건을 제외하고도 삼성가가 소장한 국보급 문화재는 160여 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움의 안목, 전시 작품 수준, 작가 후원 규모 등 인프라는 여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삼성과 리움이 쥐고 있는 미술계 헤게모니는 변치 않을 전망이다. 향후 이 위원장을 중심으로 미술계의 통합·재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삼성은 인사와 함께 조직개편을 단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배구조 개편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이 부회장이 2020년 ‘4세 경영 승계 포기’를 약속한 뒤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필요성이 대두됐다. 어수선한 기업 분위기를 다잡고 통합을 이루기 위해선 지배구조 개편이 필수다.
삼성전자와 주요 관계사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는 삼성 지배구조 개편 방안에 관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용역을 맡긴 상태다. 용역은 올 하반기 중에 마무리된다. 삼성은 BCG 보고서가 나오면 내부 검토를 마치고, 이를 토대로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집단지배체제로의 전환, 지주사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이 거론된다.

일각에선 삼성이 계열사 간 시너지를 강화하기 위해 사업 부문별로 쪼개진 사업지원(삼성전자)·금융경쟁력 제고(삼성생명), EPC 경쟁력 강화(삼성물산) 등 3개 TF를 아우르는 ‘통합 컨트롤타워’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관측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모친 홍라희 전 리움 관장이 2021년 11월1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았다.
  • Motherhood·모성

2021년 11월1일 경남 합천 해인사를 다녀온 한 관광객의 SNS에 이재용 부회장과 어머니 홍라희 전 리움 관장 사진이 올라왔다. 게재된 사진에는 이 부회장과 홍 전 관장이 손을 잡고 해인사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과 참배를 하고 나온 듯한 모습이 담겼다. 관광객은 ‘(이 부회장이) 수행단도 없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해인사 오셨네’라고 적었다. 사진은 온라인 상에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해인사도 11월2일 관련 사진과 동영상을 언론에 제공했다. 영상을 보면 홍 전 관장은 해인사 방장 원각 대종사에게 디지털 반야심경을 선물로 전달한 뒤 ‘디지털 기술이 정말발전했다. 이게 다가 아니고 이제는 가상공간이 생기면 이렇게 꽂기만 해도 자기가 그 속에서 리움 컬렉션을 다 볼 수 있는 세상이 온다’고 언급한다.

한편으로는 우연과 자연스러움이 빚어낸 듯한 이 에피소드에는 실로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 메타버스 개념으로 리움과 삼성전자를 잇고, 삼성 오너 일가 전체의 이미지도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부성(父性·fatherhood) 중심에서 홍라희-이재용·이부진(호텔신라 사장)·이서현의 모성(母性·motherhood) 체제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부회장이 어머니와 해인사를 찾은 날은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일이었다. 이 부회장은 창립 기념식이 열린 수원 디지털시티에서 임직원들과 함께하는 대신 어머니와의 해인사행을 택했다. 두 사람은 이튿날에도 경남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미술계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홍 전 관장은 리움 관장직에서 내려와 아들과 딸들의 경영활동을 조력하는 와중에도 미술품 구매를 꾸준히 해온 것으로 안다. 그만큼 부지런하고 철두철미하다는 얘기”라며 “리움을 중심으로 한 삼성의 최근 변화상을 돌아보면 홍 전 관장의 물밑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꼰대 탈출 작전MZ세대 직원들과 적극 소통삼성 사장님들이 달라졌다

“저는 발표 자료 직접 만듭니다. 다른 임원들도 시키지 마세요.” “주말에 메일 보내지 마세요. 다 체크하겠습니다.”

12월초 삼성전자 신임 대표이사가 된 경계현 사장(반도체 부문장)은 취임 이후 매주 수요일 오후 한 시간씩 ‘위톡’이라는 사내 임직원 대상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방송에서 경 사장이 내놓는 발언에 임직원들이 놀라고 있다. 전에 볼 수 없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 물어보라”는 그의 말에 현재까지 들어온 질문만 5500여 개에 이른다. 12월22일 방송에서 경 사장은 “질문을 1700개쯤 읽었는데, 나머지도 주말에 다 읽겠다”고 했다. 일부 직원의 불만엔 “그런 일이 있어서 미안하다. 고쳐보겠다”고 사과하는가 하면,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는데…”라고 말문을 떼기도 했다.

  • MZ세대와 소통 나선 삼성 CEO

심지어 경계현 사장은 최근 “2030년까지 3대 부문(메모리·시스템LSI·파운드리) 모두 1등 하자는 식의 목표 세우는 것을 하지 말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주 글로벌 전략회의에서도 “작년 매출, 올해 목표처럼 숫자 위주로 보고하지 말고 이야기, 스토리를 가지고 얘기하자”고 했다고 한다.

경계현 사장은 삼성전자가 2022년 초 시행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인사 제도 개편에 대한 일부 MZ세대 직원들의 반대도 이런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인사 개편안의 골자는 직급별 체류 연한과 연공서열·직급 구분을 없앤 패스트트랙(Fast-track) 승진제, 기존의 엄격한 상대평가 대신 절대평가제와 동료 평가제 도입 등이다. 일부 직원은 새 제도가 무한 경쟁을 부추기면서 자칫 보상은 줄어들 수 있는 불공정한 개편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경 사장은 불만을 나타내는 직원들과도 직접 소통하면서 2021년 안에 인사개편 동의 절차를 마무리짓겠다는 생각이다.

다른 신임 삼성 CEO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삼성의 배터리 사업을 총괄하는 삼성SDI의 최윤호 신임 CEO는 지난 13일 임직원들과 ‘취임 소통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앞으로 자주, 가까이에서 여러분 목소리를 듣겠다”며 “소통과 협업이 끊이지 않고 이뤄지도록 조직 문화를 혁신하겠다”고 했다. 장덕현 삼성전기 신임 CEO도 매주 목요일마다 ‘썰톡’이라는 임직원 소통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는 임직원들이 올린 1000여 개의 질문에 답하며 “내 취미는 서핑인데, 내년 여름 해수욕장에서 만나면 밥을 사겠다”고 하기도 했다.

  • 톱다운 안 통해..설득하며 이끌어야경쟁력 상실 우려도

과거의 삼성 CEO들은 직원들이 감히 소통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위계질서가 강한 내부 문화에 CEO들 대부분이 휴일도, 가족도 없이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스타일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있다. 삼성 내부에서는 삼성전기 대표 시절 ‘소통왕’으로 유명했던 경계현 사장을 삼성전자 사장으로 발탁한 것도 하나의 시그널이라고 본다. 실제로 경 사장처럼 삼성에서 전자 계열사 대표로 갔다가 다시 전자 CEO로 발탁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삼성전자 직원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MZ세대 직원들의 부상도 배경이다. 복지와 처우에 민감해, 창업자에게 ‘경쟁사보다 왜 연봉이 낮냐’고 돌직구를 던지는 세대다. 삼성의 한 임원은 “MZ세대 직원들과 소통하지 못하면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 할 상황”이라며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40대 사장, 30대 임원이 대기업들에 대거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은 그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성과주의를 바탕으로 세계 1위에 올랐는데, 제조업의 특징은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 실리콘밸리식 문화만 접목하려다가 자칫 삼성의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MZ세대와 소통하는 것도 좋지만 자칫 잘못하면 삼성의 장점인 성과주의와 빠른 실행력이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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