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죄없이 영욕의 삶 마감한 전두환

12·12군사반란 주도‘5·18 유혈 진압역사의 비극고도 경제성장, 서울올림픽 유치 등 성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촌장례식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23일 향년 90세로 별세해 27일 한 줌 재로 돌아갔다.

고(故)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 닷새째인 27일 유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결식이 치러졌다. 영결식은 유족 50여명과 종교인, 일부 5공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영결식을 지켜보며 흐느꼈고 아들 재국·재용·재만씨, 딸 효선씨, 재용씨 부인인 배우 박상아 씨 등도 영결식장으로 이동했다. 장남 재국씨의 아들이 영정 사진을 들고 영결식장에 입장했다.

이순자 여사는 유족 대표로 나와 “남편의 재임 중 고통을 받고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특히 사죄를 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무엇을 사죄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 측이 과오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무력진압 이후 41년여 만에 처음이다. 전 전 대통령이 끝내 사죄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가운데 이순자 여사가 ‘대리 사죄’를 한 것이다.

이 여사는 “6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부부로서 함께 했던 남편을 떠나 보내는 참담하고, 비참한 심정은 말할 수 없었지만 고통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이 세상과 하직하게 된 것은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평소 자신이 소망하던 장례를 간소히 하고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며 “화장해서 북녘 땅이 보이는 곳에 뿌려달라고도 했다”고 전했다.

발인이 끝난 시신은 검은색 리무진 차량으로 옮겨졌고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으로 옮겨져 화장됐다. 유해는 이후 연희동 자택으로 옮겨져 장지가 정해질 때까지 자택에 임시 안치된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의 발인식이 진행된 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운구차량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혈액암 진단을 받은 전 전(前) 대통령은 이날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심폐 소생술을 받았으나 숨을 거뒀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33년 전인 1988년 11월23일 그가 재임 기간 중 독재와 비리에 대한 책임으로 백담사로 향했던 날이다.

특히 현대사의 비극인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광주시민을 학살한 과오(過誤)에 대해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오히려 5·18 발포 명령과 관련한 진실규명을 거부하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상처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 사안은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전 전대통령은 12·12 군사 반란, 광주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이라는 과(過)를 남겼다. 집권 기간(1980~1988) 중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인권을 탄압했다. 1987년 4·13 호헌(護憲·현행 헌법 유지) 조치로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했지만 6월 항쟁을 거치며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재임 당시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약 9%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높았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출생한 전 전 대통령은 육사(11기)를 졸업했다. 1979년 10·26 사태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며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하며 집권했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회고록에서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날을 맞고 싶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이 대목이 사실상 고인의 유언이라고 밝혔다. 그는 생전에 5·18에 대해 “비극적 사태”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5·18 희생자들에 대한 공식적 사과나 반성의 메시지 없이 생을 마감했다.

전 전 대통령 측근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2017년 회고록 3권 648쪽에 사실상 유서를 남겼다”며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의 고지에 백골로 남아서라도 통일을 맞고 싶다’는 게 유서였다”고 했다. 이어 “평소에도 ‘나 죽으면 화장해서 그냥 뿌려라’라고 말씀을 가끔 하셨다. 가족들은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12·12군사반란으로 집권퇴임후 백담사 칩거, YS 때 수감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31년 1월18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출생했다. 대구공고 졸업 후 1952년 육사 11기로 입교했다. 육사 시절부터 동기생 ‘보스’를 자처했고,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 직후 육사 생도 지지 시위를 주도하며 일찍부터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1981년 3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손을 흔들고 있다.

1955년 소위 임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등 요직을 거쳤다. 영남 출신 육사 동기와 후배를 중심으로 군대 내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한 고인(故人)은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 1979년 보안사령관에 올랐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건 수사를 담당하면서 국정 공백 혼란을 틈타 권력을 빠르게 장악했다.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하나회 지휘관 휘하 병력을 동원, 최규하 대통령 재가 없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한 12·12 군사 반란은 육군 역사상 최악의 하극상으로 기록됐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았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김영삼·김대중·김종필 3김(金)을 정치 규제로 묶고 권력을 장악했다. 다음 날인 18일 광주(光州) 시민들은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 회복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에 고인의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 평화 시위를 하던 시민들을 유혈 진압했다.

같은 해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고인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고,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이듬해 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3년 미얀마 방문 당시 북한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를 현장에 4분 늦게 출발하면서 가까스로 피했다.

고인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후 국민의 민주화 열망이 분출하자 4·13 호헌 조치로 정권 연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6월 항쟁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친구 노태우 전 대통령이 6공화국을 열었지만, 이후 고인의 삶은 추락의 연속이었다.

고인은 1988년 11월 대국민 사과를 한 뒤 부인 이순자씨와 백담사에 칩거했다. 이듬해 12월엔 국회 5공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1995년 12월 내란 혐의 등으로 기소된 고인은 ‘골목길 성명’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1996년 내란, 내란목적살인죄, 뇌물 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확정했다. 이후 1997년 12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대선 승리 후 특별사면·복권됐다. 고인은 2018년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돼 말년까지 재판에 불려 다녔다. 2003년엔 추징금과 관련, “예금 자산이 29만원”이라고 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고인은 생전 자신의 과오에 대해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2017년 펴낸 회고록에서 “5·18 사태는 폭동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고 밝혔고 12·12 군사 반란에 대해서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민 전 비서관은 이날 ‘5·18에 대한 사죄가 없었다’는 지적에 “기회 있을 때마다 (했다). 33년 전 11월23일 백담사에 간 날에도 성명을 발표하고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도 “발포 명령은 없었다”며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 장악 5·18 무력 진압 피의 집권

1979년 12월12일 오후.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허삼수·우경윤 대령에게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12·12군사반란(쿠데타)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전 전 대통령이 결성한 군 사조직 ‘하나회’ 소속으로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정권 장악 시도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정 총장에게 적용했다.

허 대령 등은 이날 오후 6시50분 제33헌병대 병력을 정 총장 공관 주변에 배치한 뒤 오후 7시 10분경 정 총장을 체포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같은 시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총리공관에 있던 최규하 당시 대통령을 찾아가 정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지만 최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상의하겠다”며 서명하지 않고 버텼다.
노 장관은 참모총장 공관에서 나온 총소리를 듣고 가족과 함께 피신한 뒤 국방부 장관 집무실로 향했지만 이때 국방부로 쳐들어온 신군부에 체포됐다. 결국 최 대통령은 노 장관의 건의를 수용해 13일 오전 5시10분 정 총장 체포안에 서명했다.

1979년 11월6일 전두환 당시 국가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동시에 신군부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하면서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공백 상태에 있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신군부가 작전명 ‘생일집 잔치’로 일으킨 12·12쿠데타가 단 10시간 만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쿠데타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전 전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치며 빠르게 집권을 향해 나아갔다. ‘서울의 봄’이 오면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분출됐지만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하고 국회도 폐쇄했다.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은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년 8월 전역(육군 대장), 국가보위비상 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최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980년 8월16일 하야(下野)를 선언했고 전 전 대통령은 8월27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망자 168명(군경 포함), 행방불명 206명, 부상자 847명. 1980년 6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보고받은 피해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한 피해자는 376명으로 늘어났고 당시 부상자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국가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개월 뒤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1980년 8월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5·18민주화운동은 1988년까지 8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철권통치로 민주화를 탄압했던 전 전 대통령의 출발점이었다.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거쳤지만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은 여전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2020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역에서 일어난 최초 발포,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이뤄진 집단 발포 명령자가 누구였는지가 진상 규명의 핵심이지만 명령자가 누군지 아직 특정하지 못한 상태다. 전 전 대통령은 5월 27일 전남도청 무력 진압 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기소돼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 5월 21일과 27일 발생한 광주 도심 헬기 사격 책임자와 시신 암매장 장소, 성폭행 가해자 관련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전 전 대통령과 신군부 측은 “시위대의 공격에 군인들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일 뿐”이라며 발포를 명령한 사실 자체를 부인해왔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무장 시위대의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공격행위는 전형적인 특공작전 형태를 띠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에서 발포 명령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군사작전의 기초상식만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 민주화 탄압 철권통치언론 통폐합재갈 물려놓고 부정축재

사망자 168명(군경 포함), 행방불명 206명, 부상자 847명. 1980년 6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보고받은 피해 상황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한 피해자는 376명으로 늘어났고 당시 부상자는 30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국가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 3개월 뒤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1980년 8월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5·18민주화운동은 1988년까지 8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철권통치로 민주화를 탄압했던 전 전 대통령의 출발점이었다.

최 대통령을 압박해 하야시킨 뒤 집권한 전 전 대통령은 이른바 5공(共) 헌법을 만들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비리·부패·정쟁의 근절’을 내걸었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1981년 3월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이 집권 당시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며 특별조치로 설치한 삼청교육대는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구금하던 독재통치의 상징과도 같았다. 입법부는 고사하고 검찰과 경찰, 사법부인 법원도 ‘권력의 시녀’라는 평가를 받았던 그의 재임기는 줄곧 “연장된 군부독재 정권”이라며 “박정희 없는 박정희 시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삼청교육대에는 약 4만 명이 강제로 징집돼 54명이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소 4명 이상은 폭행으로 숨졌고 병사나 자살로 처리된 이들은 사인이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결과 발표도 이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야당 인사들과 대학생들에게 친북 용공(容共) 혐의를 덧씌워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씨는 전두환 정권에서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민주화 인사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강제 감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했다. 대학가에는 안전기획부와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학생들을 감시했고, 이들을 수시로 잡아와 탄압하며 민주화의 싹을 짓밟았다

1989년 12월 국회 5공 비리청문회 참석, 5·18 광주 진압을 ‘자위권 발동’으로 진술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집권 첫해인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를 단행했다. ‘언론창달계획’으로 포장해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강제 통폐합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실세로 통하며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은 훗날 ‘전두환 정권의 괴벨스’로 불렸다. 1980년 5월 동아일보는 ‘무사설(無社說) 저항’으로 신군부 독재에 맞섰지만 전 전 대통령은 집권 전후 대대적인 언론인 숙청을 강행했다.

언론의 입을 틀어막은 전두환 정권은 집권 내내 권력형 비리가 이어졌다. 기업으로부터 통치자금을 조성해 부정축재에 열을 올렸다. 1982년 이철희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대표적이었다. 장영자 씨의 형부는 전 전 대통령 부인의 삼촌이었고, 장 씨 사건을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시 정권의 ‘2인자’ 허화평 대통령제1정무수석비서관은 직언을 했다는 이유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다. 전 전 대통령 스스로도 재임기간 동안 95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재판을 받았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탄압하기 위해 자행했던 숱한 고문과 폭력에 스스로 발목이 잡혔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 열사의 사인을 세상에 드러낸 건 동아일보의 특종 보도였다. ‘탁 치니 억 하고’ 사망했다는 당국의 발표가 고문치사를 숨긴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파헤친 것. 이 사건은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4·13호헌(護憲) 조치로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민주화의 열망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란죄 재판에 왜 나만 갖고추징금 956억 끝내 안내

“기업인들은 내게 정치자금을 냄으로써 정치 안정에 기여하는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1996년 2월 비자금 사건 첫 공판에서) “광주(5·18민주화운동)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2003년 방송 인터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망 전까지 수차례 재판 등 공개석상에 섰지만 끝내 진정 어린 참회나 반성 없이 생을 마감했다. 당사자가 사과를 거부하고 논란성 발언만 이어가면서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등 재임 기간 벌어진 유혈 사태와 비리 등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반복됐다.

1988년 국회에서 이른바 ‘5공 청문회’가 진행됐고 5·18 책임자에 대한 처벌 요구 여론이 거세지자 전 전 대통령은 떠밀리듯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앞에서 27분 동안 사과문을 읽은 전 전 대통령은 곧장 강원 인제 백담사로 향했다. 박철언 전 의원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1988년 11월 백담사로 떠나기 보름 전인 같은 달 8일까지도 측근들에게 “노태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고 말하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2년여간 백담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1990년 12월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추진하며 전 전 대통령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은 이른바 연희동 ‘골목성명’을 통해 “내가 헌정 질서를 문란케 한 범죄자라면 내란 세력과 야합해온 김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발했다.

검찰은 1995년 12월 전 전 대통령을 내란수괴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전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7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발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기소된 전 전 대통령은 1996년 1심에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심 과정에서도 “억울하다. 왜 나만 갖고 그러냐”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이 확정됐다. 다만 같은 해 12월 김영삼 정부가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하면서 실제 수감 기간은 약 2년에 그쳤다. 법원의 추징금 납부 명령에도 그는 “예금 자산이 29만 원밖에 없다”고 버텼다.

1995년 내란죄 등의 혐의로 법정에 나란히 선 선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사망 직전까지도 전 전 대통령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나 반성의 모습은 없었다. 그는 2003년 SBS 인터뷰에서 5·18운동을 ‘폭동’이라 지칭하며 “그러니까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2017년 4월 내놓은 2000여 쪽 분량의 회고록 3권에서도 본인에게 유리한 내용만으로 채워 비난 여론이 일었다. 특히 5·18 당시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다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그는 2019년 3월 피고인 신분으로 광주지법 재판에 출석하던 날도 ‘광주 시민들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왜 이래”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재판 시작 22분 만에 졸기 시작한 전 전 대통령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해 11월 강원도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사실이 알려진 데 이어 12월엔 서울 강남의 고급 중식당에서 호화 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돼 지탄을 받았다.

죽음으로 진실 묻을 수 없어끝까지 범죄행위 규명할 것

5·18 관련 시민단체들 격앙 사죄 커녕 5·18 모독하고 폄훼변명과 회피로 역겨운 삶 살아

“죽음으로 5·18 진실을 묻을 수는 없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들은 물론 광주 시민들의 반응이 싸늘하다. 5·18을 유혈 진압해 정권을 찬탈하고도 사죄나 참회하지 않고 버티면서 구차한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하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에서다. 시민사회단체는 전 전 대통령의 범죄 행위를 사후에도 끝까지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와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5·18구속부상자회, 5·18기념재단 등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4개 단체는 23일 오전 광주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전 전 대통령의 사망과 관련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은 죽더라도 5·18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5·18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단체는 “학살자 전두환은 자신이 5·18과 무관하다며 구차한 변명과 책임회피로 일관해 왔기에 우리는 그의 고백과 참회, 사법부 엄벌을 강력히 촉구해왔다”며 “그동안의 재판이 대한민국 헌정사를 유린하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책임자에게 엄중한 법적 책임을 묻는 ‘역사적 심판’이 되기를 기대했다”고 말했다.

5·18 기념재단과 5월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가 11월23일 광주 5·18 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전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문을 발표하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단체는 “하지만 전씨는 사죄는커녕 자신의 회고록으로 5·18 영령들을 모독하고 폄훼하면서 역겨운 삶을 살았다”면서 “그는 법정에 서서도 거짓말과 왜곡으로 국민과 대한민국 사법부를 기망하다 재판이 지연되면서 결국 생전에 역사적 심판을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죽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단체는 “전씨 사후에도 오월학살 주범들에게 반드시 책임을 묻고, 만고의 대역죄인 전두환의 범죄 행위를 명명백백히 밝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5·18 민주화운동 유가족는 “사죄 한마디 없이 떠난 전두환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이명자 오월어머니집 관장은 “전두환이 생전 어떤 식으로든 광주시민과 국민께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며 “하지만 그가 사죄를 하지 않고 버티다 숨졌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광주 시민들은 전씨가 유혈 진압에 대해 끝내 사과하지 않고 숨진 데 대해 분노하면서도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을 결코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5·18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에 처해져 뒤늦게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박영순(62·여)씨는 “광주의 얼룩진 피로 얻은 대통령이 지금껏 사과 한마디 없이 사망한 것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라며 “공포의 총소리에 동료 학생들이 현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공포와 악몽으로 4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에 의존했지만, 지금도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시민 이태범(51)씨는 “비록 전씨는 숨졌으나, 현재 진행 중인 재판과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 등을 통해 진실을 명확히 밝혀 5·18 영령들의 한을 달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두환정권 당시 군에 끌려갔다 의문사한 피해자의 유족 측은 전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에 “사과 한마디 없이 죽었다”며 억울한 심경을 밝혔다. 이날 ‘녹화·선도공작 의문사 진상규명대책위원회’가 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유가족인 최종순 대책위 대표는 “진실을 밝혀야 할 범인들이 사과도 없이 하나둘 죽어가고 있다”며 “군사정권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의문사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두환정권 당시 국군보안사령부가 주도한 녹화·선도사업은 학생운동 관계자를 강제 징집해 이들을 ‘프락치’로 이용했다.

집권기간 평균 9%대 고도성장서울올림픽·아시안게임 유치 성과

경제전문가들 발탁해 전권위임GDP 2.8배로 늘리고 선진국 기반 마련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집권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집권기(1980~1988년)는 정치적으론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고 인권을 탄압한 ‘철권통치’의 시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과 물가 안정을 이루며 선진국 진입의 기반을 닦은 시기이기도 했다. 기록적인 경제성장과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등은 공적으로 평가된다.

김재익·사공일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관료에 전권을 위임, 박정희시대 때 정부가 주도했던 경제정책을 시장 중심으로 바꾼다. 그가 김재익에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집권 첫해인 1980년 1714달러이던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로 2.8배 늘었다. 1970년대 말 중동발 경제붐과 1980년대 중반 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3저(低)호황’도 영향을 미쳤지만, 집권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9.3%로 역대 정부 중 가장 높다.

전 전 대통령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등 경제 전문가를 발탁하고 이들에게 정책의 전권을 위임했다. 전 전 대통령이 당시 김 전 수석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며 전권을 맡겼다는 일화는 지금도 회자된다. 경제 참모들은 공산품 가격 인상을 억제했고, 수입 규제는 풀었다. 예산도 동결·긴축해 시중에 돈이 풀리는 것을 막으며 물가를 잡았다.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중복 투자도 정리해 거품을 제거했다.

경제정책에 자신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 전문가들에게 맡긴 결과 ‘경제성장’과 ‘물가 안정’을 동시에 이뤄냈다. 집권 초반 국내외 경제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1980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6%,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달했다. 경상수지는 적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1979년 석유 파동 여파도 있었다.

전 전 대통령 집권기에는 연평균 약 9%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집권 첫해인 1980년 1714달러이던 국민 1인당 GDP는 집권 마지막 해인 1988년 4754달러가 돼 2.8배로 늘었다. 부가 가치가 높은 자동차·전자·반도체 같은 첨단 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로 인해 중산층이 두꺼워졌다. 다만 이런 경제적 성과의 이면에는 정경유착 등 각종 권력형 비리도 있었다. 재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에서 약 70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재임 중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가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강종합개발사업도 추진해 강변북로⋅올림픽대로 등을 확대 신설했다. 사회적으로는 야간 통행 금지를 풀고 과외 금지, 교복 자율화를 시행하고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도 했다. 또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하고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차례로 도입함으로서 사회에 개방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으려 했지만, 이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 전 대통령이 유치한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고도성장 과정에서 기업과 정치권의 정경유착은 만연해졌고, 재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약 7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하고 1983년 프로축구와 프로씨름을 차례로 도입했다.

전 전 대통령 측은 그가 결과적으로 7년 단임 약속을 지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부를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한 것은 우리 현대 정치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자평했다.

한편, 2013년 9월 월간지 《한국논단》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평가’ 사설은 전두환 시대를 다른 관점에서 평가한 것이 리바이벌되고 있다. 필자 이동유씨는 사설에서 “독재자의 정의(定義)는 장기 집권이다. 헌법을 마음대로 고쳐서 물러나지 않으면서 인권 탄압을 자행하는 사람을 독재자라고 본다”며 전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통치를 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독재자’로는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전 대통령은 장기 집권이 가능하던 헌법을 고쳐 대통령의 임기를 7년 단임으로 설정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며 “그는 더구나 국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자 이를 막으려 하다가 몰리게 되니 6·29선언을 결단해 이를 수용했다”고 전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이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긴 사람’이란 대목”이라며 “한 국가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라고 밝혔다.

유럽에선 영국이 1688년의 명예혁명을 통해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을 확립했다. 미국은 1776년 건국 시부터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프랑스는 1871년 보불(普佛)전쟁에 져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쫓겨난 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권 교체기에 들어갔다. 독일과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부터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가 가능한 나라가 됐다. 스페인은 철권 통치자 프랑코가 죽은 2년 뒤인 1977년부터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구(舊)소련과 동구권 나라들은 1989년경부터 이 시기로 들어갔다.

필자는 “한국에선 1988년 전두환 퇴임으로부터 이 전통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사설은 전두환 시대의 경제 성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제5공화국 관련 경제정보>

박정희 정권 마지막 해(1979년)와 전두환 정권 마지막 해(1988년)의 비교

  1. 1979년 1인당 GNP: 1546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 개 국가 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88년 채권과 채무: 외채 320억 달러, 대외자산 253억 달러, 1989년 순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19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전두환 정부는 연평균 10.1%로 당시 세계 1위의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됐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출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했다. 또한 통신망 설치와 전자 산업 육성을 국책 사업으로 추진해 1990년대의 인터넷-전자 산업 강국을 예비했다.

필자는 “이 경제성장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며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약 70%가 됐다. 이들이 민주화의 주력 부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의 온건 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 역할을 했다”며 “경제 성장이 만든 쿠션이 한국 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열풍을 견뎌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경제 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경제 성공의 공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김재익 경제수석에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며 “김재익씨를 잘 부린 사람이 전 전 대통령이었고, 김 수석은 1983년 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설은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전 대통령의 단임 실천을 가능케 했고, 동시에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뒷받침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런 호재로 안보면에서도 대북 우위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功過는 역사가 평가, 사과 안해 안타깝다불교식으로 입관
김용갑 “6월항쟁때 직선제 보고 대통령이 좋다, 특명내리마관방장관 고인의 명복 빈다

11월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는 부인 이순자 여사와 장남 재국, 차남 재용씨가 자리를 지키며 조문객을 맞이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조문을 마친 뒤 “유엔 사무총장이 된 이후 전 전 대통령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며 고인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반 전 총장은 “여러 가지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라 생각하지만 5·18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며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용서를 빌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인을 보좌했던 5공(共) 출신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회고하면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5공 마지막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김용갑 전 의원은 조문 후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국민이 포용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책임론에 대한 용서를 참모로서 대신 구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김 전 의원은 그러면서 1987년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수용을 발표한 ‘6·29 선언’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이 (노 후보를) 직접 설득한 것”이라고 했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여당인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을 계속 주장했고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다”며 “6월 항쟁 이후 대치 정국을 방치하면 나라가 어려워지겠다고 판단해 전 전 대통령에게 ‘내각제를 포기하고 직선제를 해야겠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그렇게 보고하니 전 전 대통령이 ‘좋다, 특명을 내릴 테니 노태우 부하에게 가서 설명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6·29 선언 기획자가 전 전 대통령인지, 노 전 대통령인지 양측 주장이 엇갈리지만, 직선제 수용을 전 전 대통령이 결단한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게 김 전 의원 주장으로 보인다.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이 11월25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전두환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전 전 대통령 장남 전재국, 차남 전재용 씨 등 유가족과 인사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정무비서관을 지낸 박철언 전 의원은 “집권 과정에 엄청난 어려움과 과오도 있었지만 재임 기간 물가 안정과 경제성장, 88 서울올림픽 유치 등을 해냈다”며 “한 시대가 끝났는데 어둡고 아픈 역사는 다 떠나보내고 모두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이재오 상임고문도 이날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이 고문은 “저는 전두환 정권 때 두 번이나 감옥에 갔던 사람”이라며 “전 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한 일은 역사적 심판을 받은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은 전직 대통령이 돌아가셨으니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조문하는 것이 마땅한 예의라는 차원에서 왔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차녀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은 조문을 하고 “죽음이라는 게 용서와 화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일본 정부도 11월24일 전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에 공식 애도 메시지를 냈다. 이날 지지통신과 닛케이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정부 대변인인 마쓰노 히로카즈 관방장관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전 전 대통령의 별세에 “애도의 뜻을 표시하는 동시에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마쓰노 관방장관은 전 전 대통령에 대해 “1984년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일본을 공식 방문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전두환 전 태통령의 입관식이 장례 3일 차인 25일 오후 불교식으로 진행됐다. 전 전 대통령의 입관식이 25일 오후 5시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부인 이순자 씨, 아들 재국·재용·재만 씨와 딸 효선 씨 등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입관식은 이날 오전 10시에 예정됐으나, 재만 씨의 입국 절차가 늦어지면서 연기됐다. 미국에 거주 중인 재만 씨는 이날 오후 2시40분쯤 빈소에 도착했다. 재만 씨는 이날 오전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해 코로나19 유전자증폭(PCR) 검사를 받은 뒤 빈소에 도착했다. 이날 빈소에는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씨, 김형오 전 국회의장,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황교안 전 대표와 민경욱 전 의원,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정구영 전 검찰총장 등이 조문했다.

누가 봐도 저희는 죄인전두환 전 대통령 며느리 박상아의 반성

박상아는 전재용 목사공부 반대  대통령은 기뻐해전재용 “교도소에서 갑자기 찬송가 소리 들려 결심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별세하면서 목사가 된 전 전 대통령의 차남 전재용씨와 그의 부인 박상아씨가 출연한 과거 방송이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는 전씨의 말에 아내인 배우 박 씨는 반대했지만 아버지 전 전 대통령은 기뻐했다고 밝혔다.

11월 24일 극동방송에 따르면 전재용·박상아 부부는 지난 3월 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듣고 싶은 이야기’에 출연했다. 이들 부부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전 씨는 박 씨와 함께 경기 지역의 한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3월 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듣고 싶은 이야기’에 출연했을 당시의 전재용·박상아 부부.

아내 박 씨는 처음 전 씨의 신학대학원 진학을 반대했다고 했다. 박 씨는 “누가 봐도 죄인인 저희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사실 숨기고 싶은 부분인데 사역까지 한다는 것은 하나님 영광을 너무 가리는 것 같았다”며 “안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 생각은 저희 생각과 다른 것 같다”고 했다.

전 씨는 “교도소에서 2년 8개월이란 시간을 보내게 됐는데, 방에 앉아 창살 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찬송가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 찬양,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전 씨는 “신학대학원에 가기 전에 부모님(전 전 대통령 부부)에게는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며 “아버지는 치매라서 양치질하고도 기억을 못 하는 상태였는데도 말씀드렸더니 생각하지 못한 만큼 너무 기뻐하셨다”고 했다.

전 씨의 아내 박상아씨는 1995년 KBS 제1회 슈퍼 탤런트 선발대회 대상을 받았다. 이후 ‘젊은이의 양지’ 등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지난 20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전재용씨와 비밀리에 혼인 신고를 한 후 연예계를 은퇴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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